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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독서할 시간은 없는데, 시장에 갈 시간은 있다

by 다이아몬드주부 2026.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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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미는 독서입니다.

이상하게도 퇴직을 하고 나니 책 읽을 시간이 더 없어졌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출퇴근길 지하철이 나만의 도서관이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책장을 넘기던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조용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직원도 아닌 오롯이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퇴직하면 시간이 넘쳐날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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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퇴직하고 보니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갑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탁기도 없고, 식기세척기도 없고, 로봇청소기도 없던 시절에는 왜 지금보다 시간이 더 많았던 것처럼 느껴질까요.

지금은 기계가 많은 일을 대신해 주는데도 우리는 더 바쁘게 살아갑니다.

아마 시간은 기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폭염 때문인지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렸고 선글라스 하나에 모자를 눌러쓴 채 천천히 걸었습니다.

책 두 권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자연스럽게 재래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시장도 폭염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절반은 문을 닫았고, 남은 상인들은 뜨거운 여름을 온몸으로 견디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순대가 먹고 싶었습니다.

늘 가던 순대집으로 갔습니다.

30년은 훌쩍 넘게 장사를 하셨을 것 같은 아주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순대를 썰고 계셨습니다.

예전에는 그 앞에서 파를 팔던 친정어머님도 계셨는데, 어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괜히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제 또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셨습니다.

"순대 1인분이랑 돼지머리 눌린 것 1인분 주세요."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긴 가디건에 모자까지 쓰셨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저는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닦고 있었지요.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어떻게 이렇게 더운데 땀을 하나도 안 흘리세요?"

그분은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에어컨 바람만 쐬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서 추워."

같은 여름인데도 사람마다 느끼는 계절은 참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순대집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습니다.

"사장님,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순대집 아주머니는 능숙하게 칼질을 하며 웃었습니다.

"비결이 뭔지 아세요? 아이스크림을 끊었어요."

우리 둘은 동시에 웃었습니다.

"아, 그래서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또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근데 나는 땀이 왼쪽만 나."

순간 우리는 아주머니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오른쪽은 안 나고 왼쪽만 흘러."

별것 아닌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셋은 한참을 웃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릅니다.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세 명의 중년 여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몇 마디의 대화와 짧은 수다가 하루를 환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우울하거나, 외롭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시장에 갑니다.

시장은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를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특별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이 나서 시장에 갔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것입니다.

독서할 시간은 없는데 이상하게 시장에 갈 시간은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책을 읽지 못한 대신 사람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한 권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면,

시장에는 수백 권의 책이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퇴직 후의 삶은 책장을 넘기는 시간보다,

사람의 얼굴을 읽고,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의 하루를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책 두 권을 빌려 왔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책 속 문장이 아니라,

"나는 땀이 왼쪽만 나."

하며 웃던 순대집 아주머니의 한마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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